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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정보
감독 :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 맷 데이먼, 톰 홀랜드, 앤 해서웨이 등
개봉 : 2026.08.05
러닝타임 : 172분

어렸을 때 친구 집에 놀러 가면 책장 한 칸을 통째로 채운 그리스 로마 신화 전집이 있는 집들이 있었다. 그 친구들은 제우스니 아테나니 하는 이름들을 마치 옆집 사람 이름처럼 줄줄 꿰고 있었고, 그게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우리 집에는 그런 전집이 없었으니까.
그 결핍을 조금이나마 채운 건 성인이 되고 나서였다. 대학로에서 호메로스의 원전을 바탕으로 한 연극 《일리아스》를 본 것이 그 시작이었다. 배경도 CG도 없이 배우들의 목소리와 대사만으로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분노와 자존심을 밀어붙이던 무대는, 그리스 신화 속 인물들이 얼마나 거대한 존재인지를 새삼 실감하게 했다.
그런데 이번에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를 보고 나서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감정이 남았다. 연극이 인물들의 '대단함'을 보여줬다면, 이 영화는 오히려 그 대단한 인물들이 얼마나 작고 초라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개봉 전부터 인터넷에서 쏟아진 이야기들, 이를테면 놀란이 고대 그리스를 영화화했다는 사실이나 초대형 스크린을 겨냥한 촬영 방식, 화려한 배우진 같은 이야기는 잠시 내려놓으려 한다.
내가 궁금했던 것은 따로 있었다. 놀란은 왜 지금, 3천 년 가까이 살아남은 이야기를 다시 영화로 만들었을까?
신은 직접 등장하지 않는데, 신성은 어디에나 있다
《오디세이아》 원전을 알고 있다면 이번 영화에서 독특하게 느껴지는 지점이 있다. 신들이 인간의 모습으로 직접 등장해 모든 사건을 설명하고 해결하는 방식이 중심에 놓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 영화는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자연을 통해 신적인 존재감을 만들어낸다.
특히 바다는 그렇다. 잔잔하다가도 순식간에 뒤집히고,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배를 집어삼키는 바다는 오디세우스가 감히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힘으로 존재한다. 신을 눈앞에 보여주는 대신,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자연 그 자체에 신성을 부여한 셈이다.
아테나 역시 조금 다른 방식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모든 것을 직접 움직이는 초월적인 존재라기보다 인물의 정신과 판단, 환상과 같은 영역에 개입하면서 이야기에 영향을 준다.
이런 선택이 흥미로운 이유는 단순히 화면을 절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 얼마나 거대한 존재 앞에서 무력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아무리 지략이 뛰어나고 용감한 영웅이라도 바다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진다.
그래서 거대한 화면이 오히려 역설적인 효과를 만들어낸다. 화면이 커질수록 영웅이 더 위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화면 속에 놓인 인간이 더 작아 보이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오디세이》의 거대한 스크린은 단순한 볼거리를 위한 선택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의 크기를 대비시키는 연출 방식으로 읽힌다.
《오펜하이머》의 그림자, 또 한 명의 죄를 짊어진 남자
전작 《오펜하이머》를 떠올리면 이번 오디세우스에게서 낯익은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오펜하이머는 인류의 역사를 돌이킬 수 없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했다. 전쟁을 끝내고 더 큰 희생을 막는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그 결과가 가져온 책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오디세우스 역시 자신의 지략으로 전쟁을 끝내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이 감당해야 할 대가를 남긴다. 트로이 목마는 단순히 영웅의 지혜를 보여주는 멋진 전략이 아니다. 전쟁을 끝내기 위한 계책이었지만, 동시에 도시를 파괴하고 수많은 사람의 삶을 무너뜨린 행위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디세우스의 긴 귀향길을 단순한 모험담으로만 바라보기 어렵다. 그가 10년 동안 바다를 떠돌아야 했다는 사실은 물리적인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심리적 여정처럼 느껴진다.
이 지점에서 《오디세이》는 《오펜하이머》와 닮아 있다. 놀란은 계속해서 인간의 선택과 그 선택이 만들어낸 결과를 이야기해 왔다. 《오펜하이머》에서는 과학과 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통해 그 질문을 던졌다면, 《오디세이》에서는 한 영웅의 귀향이라는 오래된 이야기 속에서 같은 질문을 되풀이한다.
인간은 자신이 저지른 일의 무게를 어떻게 감당하는가. 이 질문이야말로 두 작품을 이어주는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오디세이》 안에서 다시 보이는 놀란의 영화들
이번 작품을 보고 있으면 놀란의 이전 영화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메멘토》 — 기억과 정체성 사이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하려는 남자의 이야기
《인셉션》 —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세계에서 가족에게 돌아가려는 남자의 이야기
《인터스텔라》 — 시간과 공간을 넘어 가족에게 돌아가려는 아버지의 이야기
《덩케르크》 — 거대한 전쟁 속에서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렇게 놓고 보면 《오디세이》는 놀란이 오랫동안 다뤄온 주제들을 한꺼번에 품고 있는 이야기다. 기억, 시간, 죄책감, 가족, 귀향, 생존. 놀란이 지금까지 반복해서 탐구했던 요소들이 호메로스의 오래된 서사 안에 이미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 작품을 단순히 '놀란이 처음으로 고대 신화를 영화화했다'고만 보는 것은 조금 아쉽다. 오히려 자신의 영화 세계와 가장 잘 맞는 오래된 이야기를 찾아낸 것으로 보는 편이 더 흥미롭다.
특히 놀란의 영화에서는 거대한 사건이나 복잡한 시간 구조가 인물의 감정을 압도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오디세이》는 애초에 한 사람이 가족과 고향을 향해 돌아가는 이야기다. 거대한 세계를 보여주면서도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한 사람의 귀향이다. 어쩌면 놀란이 오랫동안 다뤄온 거대한 시간과 공간의 이야기가 이번에는 가장 오래된 귀향 이야기와 만난 셈이다.
엔딩 크레디트에서 다시 생각하게 된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
영화가 끝나자마자 바로 일어나서 나가는 사람이 있고,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있다. 나는 후자다.
이번에도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기 시작할 때 자리를 지키며 인물들의 이름을 눈여겨보았다. 그리고 영화 초반부에 등장해 서사를 열어주었던 인물의 이름을 확인하면서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 이야기는 결국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라는 것.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애초에 오랜 시간 동안 이야기꾼들의 입을 통해 전해져 온 구전 전승이다. 영웅의 모험도, 전쟁도, 신들의 존재도 결국 누군가의 목소리를 통해 다음 세대로 전달되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영화 속에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들의 존재가 조금 다르게 보였다. 《오디세이》는 단순히 '오디세우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라, 그 이야기가 어떻게 기억되고 전해 지는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수천 년 전 한 사람의 귀향길이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을 증명한다. 마케팅 포인트로는 잘 부각되지 않을 디테일이지만, 자리를 끝까지 지키며 놀란이 이 오래된 서사를 대하는 태도를 다시금 상기하게 된 순간이었다.
늙은 개 한 마리가 보여주는 귀향의 의미
《오디세이》에서 내가 가장 오래 기억하게 될 장면 중 하나는 오디세우스와 늙은 개의 만남이다.
원작에서 오디세우스는 20년 만에 고향 이타카로 돌아온다. 하지만 변장한 그의 모습을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늙고 병든 개 아르고스만큼은 주인을 알아본다. 그리고 오랜 기다림 끝에 주인을 알아본 뒤 생을 마감한다.
이 장면은 오래전부터 《오디세이아》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로 꼽혀 왔다. 영화로 옮길 때는 얼마든지 감정을 크게 만들 수 있는 장면이다. 배경음악을 크게 깔고, 오디세우스의 표정을 클로즈업하고, 두 존재의 재회를 강조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장면일수록 오히려 담백하게 보여줄 때 더 오래 남는다. 왜냐하면 이 장면이 말하는 것은 단순한 '주인과 개의 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귀향은 단순히 원래 있던 장소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변했어도 나를 알아보는 존재가 있을 때, 비로소 돌아왔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는 것. 20년 동안 세상이 변했고 오디세우스 자신도 변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달라진 순간에도 한 존재만은 그를 기억한다.
그래서 이 장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디세우스가 집에 돌아왔다는 사실보다, 누군가가 그를 여전히 '오디세우스'로 알아보았다는 사실인지도 모른다. 수많은 전투와 모험보다 이런 작은 장면이 오히려 '귀향'이라는 말의 의미를 더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오디세이》는 왜 극장에서 봐야 할까
《오디세이》를 장면 하나하나만 떼어놓고 보면 다소 밋밋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화려한 전투나 신들의 초자연적인 능력이 끊임없이 등장하는 영화는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전체를 하나의 질문으로 바라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신을 눈앞에 세우는 대신 자연을 통해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고, 영웅의 모험을 죄책감과 책임의 이야기로 바라보고, 수천 년 된 귀향의 서사 안에서 기억과 가족, 시간이라는 익숙한 놀란의 주제를 다시 꺼내놓는다.
결국 《오디세이》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거대한 세계를 보여주느냐가 아니다. 그 거대한 세계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그리고 그렇게 작은 인간이 왜 끝까지 자신이 돌아갈 곳을 찾아가는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
그래서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본다면 단순히 거대한 화면과 압도적인 사운드만 기대하기보다, 그 화면 속에서 작게 보이는 인간을 한 번 바라봤으면 한다.
문명이 무너지고, 시간이 흐르고, 사람의 모습까지 달라져도 끝내 돌아가고 싶은 곳은 어디인가. 어쩌면 놀란이 3천 년 가까이 살아남은 이야기를 지금 다시 꺼내든 이유도 바로 그 질문에 있는 것인지 모른다. 영웅의 진짜 모험은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잃고도 결국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을 찾아가는 과정일 테니까.

